관계는 데이터다.
일명 CRM, 즉 고객관계관리 (Customer Relationship Management)는 다 아시지요? 다소 소프트하게 들리기도 하는 고객관계관리라는 영역은 얼핏 사람간의 관계, 즉 고객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커뮤니케이션이나 협상전략 같은 다루는 영업이나 서비스 직무 영역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물론 실제로 CRM 영역은 커뮤니케이션과 협상 관련된 프로세스나 전략을 중요한 직무범위에 포함시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기업의 CRM 관련 부서에는 실제로 ‘데이터 (Data)’를 관리하고, 분석하는 업무가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또한, 대학에서 운영되는 CRM 교과목 역시 커뮤니케이션 관련 학문 영역이라기 보다는 데이터 분석 영역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관계(relationship)라는 개념은 사실 데이터(data)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고객제표가 고객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기업평가 시스템이기 때문에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관계라는 본질이 그렇다는 것이죠. 사람 간의 관계가 형성돼 가는 과정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우리는 누구를 처음 만났을 때 통성명을 하며 상대방의 이름과 연락처 정도만 받습니다. 그리고 만남이 반복되면 그 사람의 취미나 종교, 성격, 음주 여부 등 특징적인 면을 하나 둘 알게 됩니다. 관계가 깊어지면서 그 사람의 경제력, 종교, 가치관, 철학, 건강 상태, 가족 현황 등을 조금 더 깊게 알게 되지요.
즉, 우리가 누군가와의 관계를 만들고, 그 관계가 깊어지면서 얻어지는 것은 대부분 그 사람의 정보, 즉 데이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특성 정보뿐만 아니라 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발생한 이벤트나 추억 등도 글이나 사진 등으로 기록되면 이것도 엄연히 데이터가 됩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에 대한 지식(knowledge)이자 앎(knowing)의 수준은 곧 그 사람과의 관계의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남의 횟수나 기간만으로는 관계의 수준을 평가할 수 없는 것이죠. 10년 동안 매주 만났더라도 상대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다면 그 관계를 좋은 관계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기업이 고객과의 관계를 시작한다는 것은 고객의 데이터를 얻어가기 시작한다는 것이고, 이는 곧 구매고객의 식별화가 진짜 관계의 출발점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서로 알아 간다는 것은 상대방의 데이터를 획득하고 지각할 수 있는 정보가 더 넓고 깊어진다는 뜻이지요. 그래서, 기업은 고객 정보의 범위와 깊이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고객 정보력, 범위와 깊이의 시너지
관계가 데이터라는 점을 이해했다면 고객과의 관계가 고객정보의 양적, 질적 수준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고객정보의 범위와 깊이로 나눠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고객정보의 범위는 얼마나 많은 고객을 식별할 수 있는지, 즉 고객 이해의 범위를 가리킵니다. 구체적으로 이 범위는 총 매출 중 식별된 구매고객의 매출비율 또는 추정된 총고객 수 중 식별고객 수의 비율로 측정할 수 있습니다.
가령 최근 수행한 고객제표 시범사업에 참여한 한 소비재 기업의 경우 총매출액 중 68%가 식별고객에 의해 발생한 매출액이었는데요, 이는 0.68점에 해당하는 고객정보 범위로 소비재 기업 중에서는 매우 높은 수준이었습니다. 해당 기업이 전통적인 오프라인 리테일 채널뿐만 아니라 자사 몰과 네이버의 브랜드 스토어같이 직접적으로 통제 가능한 온라인 유통채널의 비중을 강화해 식별고객의 비율을 높이는 데 주력해온 결과입니다.
한편 고객정보의 깊이는 개별 고객에 대해 얼마나 많은 정보를 파악할 수 있는지, 즉 고객 이해의 깊이를 가리킵니다. 구체적으로는 자사에서 관리하고 있는 고객정보 유형의 다양성을 계량화해 측정할 수 있습니다. 고객정보의 유형 분류는 다양한 기준에 의해 구분될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형태론적 관점, 의미론적 관점, 고객전략 관점의 데이터 분류가 많이 사용됩니다.
형태론적 관점의 분류는 데이터의 형태적인 특성에 따라 고객정보 유형을 나눕니다. 이는 데이터 분석을 위한 기술적인 관점에서 유용한 분류 기준이 됩니다. 데이터 형태에 따라 데이터의 처리나 분석기법의 활용 범위가 제한되기 때문이지요.
의미론적 관점의 분류는 해당 정보가 가지고 있는 의미나 목적에 따라 고객정보 유형을 나누게 됩니다. 데이터 분석뿐만 아니라 고객과의 커뮤니케이션 직무 설계에 직접적으로 활용될 수 있기 때문에 형태론적 데이터 분류에 비해 실무적인 활용도가 높은 편입니다.
고객전략 관점의 분류는 의미론적 관점의 데이터 분류에 고객의 개념을 접목해 고객의(of-the-customer), 고객에 의한(by-the-customer), 고객을 위한(for-the-customer) 정보로 나누기도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에이브러햄 링컨의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이라는 모토를 고객 데이터에 접목한 것이죠.
의미론적 관점의 데이터 분류 중 평가정보는 결국 고객을 위한 기업의 활동을 평가하고 정의하기 위한 정보라는 점, 제안정보는 단순히 상품 판매를 위한 추천 정보의 범위를 넘어 고객과의 맞춤형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메시지 스크립트(script)나 다양한 콘텐츠도 포함해야 한다는 점에서 ‘고객을 위한’ 정보로서 관리돼야 한다는 전략적 의미를 내포합니다.
또한 고객전략에 의한 정보 분류는 고객과의 관계 진화 과정에 따라 점진적으로 데이터도 변해야 할 필요성을 제시하는데요. 가령 관계가 시작되는 초기에는 고객의(of-the-customer) 정보에 집중해야 하고, 고객과의 거래와 커뮤니케이션이 전개될수록 고객에 의한(by-the-customer) 정보를 수집하거나 분석을 통한 파생정보를 창출할 수 있어야 하며, 결국엔 이런 데이터들을 기반으로 고객을 위한(for-the-customer) 정보를 생성해야 실질적인 고객 경영 활동에 임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한편 고객정보의 깊이도 정량적인 수치로 그 수준을 평가할 수 있습니다. 기업이 현재 관리하고 있는 고객정보 항목들이 얼마나 이론적인 고객정보 유형을 충족하고 있는지 일종의 커버리지(coverage)를 계산하면 됩니다. 당사의 경우 고객전략 관점의 고객정보 분류 기준을 자주 활용하는데요. ‘고객의’ 정보 항목 8가지, ‘고객에 의한’ 정보 항목 12가지, ‘고객을 위한’ 정보 항목 7가지 등 총 27개의 항목을 기준으로 두고 기업이 관리하고 있는 데이터 항목의 비율을 측정합니다. 앞서 언급한 고객제표 시범사업에 참여한 소비재 기업은 ‘고객의’ 정보로서 이름, 연락처, 배송 주소 등 3가지를, ‘고객에 의한 정보’는 고객별 매출 집계와 멤버십 등급, 포인트 정보 등 3가지만 보유하고 있고, ‘고객을 위한’ 정보는 별도 관리를 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즉, 6/27=0.22 수준의 고객정보의 깊이에 대한 역량을 보유하고 있는 셈이죠. 이 기업은 고객정보의 범위는 상대적으로 우수하지만 고객정보의 깊이는 평균 이하의 수준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기업의 고객정보 범위와 깊이 수준을 알았다면 ‘고객정보의 범위 점수 ✕ 고객정보의 깊이 점수’로 기업의 ‘고객정보력’이라는 하나의 평가지표를 산출할 수 있습니다. 기업의 고객정보력은 각 항목의 수준이 서로 상호작용하며 시너지 통해 나타나는 역량이기 때문에 두 항목 점수의 덧셈이 아니라 곱셈으로 산출된다는 점을 유의해야 합니다. 즉, 한쪽 측면의 점수가 매우 높아도 다른 한쪽 측면의 점수가 낮으면 전체적인 고객정보력은 낮아진다는 것이죠. 그래서 상기 사례 기업의 고객정보력은 0.68 ✕ 0.22 = 0.149점이 됩니다 (100점 기준으로는 15점).
다음에는 고객정보의 범위와 깊이 수준에 의해 분류될 수 있는 고객정보력 4분면에 대해 알아보고, 각 영역에 속한 기업들의 특징, 그리고 이런 기업들이 극복해 나가야 할 시사점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